📰 털보 칼럼
갈라치기와 혐오의 시대
― 우리는 어떻게 '분열'의 공범이 되는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나뉘는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이념 대립까지, 공론장은 서로를 향한 비난과 혐오로 가득하다.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갈라치기'라는 전략이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끊임없이 갈라놓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구조에서 자유로운가?
정치의 오래된 기술, '분열'
갈라치기는 정치권의 오래된 전술이다. 대중을 둘로 나누고, 한 쪽의 공포와 분노를 자극해 결집시키는 방식이다. 선거철이면 더욱 극명하다. 20대 남성과 페미니스트, 수도권 청년과 지방 노년층, 자영업자와 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 구도는 일종의 정치적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된다. '적'이 있어야 '아군'도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남은 건 깊어진 혐오와 무너진 신뢰다. 정치적 득실은 사라지고, 사회의 균열만이 남는다.
클릭이 만드는 혐오
언론과 뉴미디어도 갈라치기의 조력자다. 조회수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극이다. 그래서 언론은 갈등을 부각시키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분노를 먹고 자란다. 제목은 과감하게 편을 나누고, 영상은 정서적 선동으로 가득하다. 어느새 우리는 '사실'보다 '감정'을 소비하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는 분노를 공유하게 하고, 공유는 다시 혐오를 확산시킨다. 누군가의 인간성이 유희거리가 되고, 특정 집단은 끊임없이 희생양이 된다. 혐오는 이제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콘텐츠의 연료다.
우리는 정말 피해자인가?
많은 사람들이 “나는 갈라치기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무비판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혐오 표현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순간, 우리는 그 구조의 일원이 된다. 댓글 하나, 좋아요 하나가 특정 프레임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혐오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지만, 그것이 커지는 과정에는 수많은 '작은 동조'가 있다. 그리고 그 동조가 쌓일 때, 혐오는 문화가 된다.
분열의 언어를 넘어, 연결의 언어로
이제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누가 이 갈등에서 이득을 보는가?”
갈라치기의 언어는 쉽게 전염되지만, 공감의 언어는 학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프레임에 휘둘릴 것인가,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반박할 것인가.
분열은 사람을 소외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공감과 연대는 우리를 다시 연결시킨다. 혐오에 맞서는 가장 강한 무기는 거창한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와 태도다.
우리 모두는 작은 매일의 선택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 책임은 거대 담론의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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